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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면의 도시] 1. 잃어버린 얼굴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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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이한은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는 빛나는 연구실에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가 커다란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작은 칩 하나가 정교한 3D 그래픽으로 반짝였다. 바로 페이스(FACE)칩이었다. 그는 이 칩이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거라 믿었다. 편리함, 안전, 그리고 완벽한 질서. 옆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민준과 서현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축복했다.

 

"이한, 자네는 정말 천재야! 이 기술 하나로 세상이 완전히 바뀔 거야!" 민준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꿈속의 화면이 깨지면서 핏빛으로 물들었다. 칩을 빼앗으려는 사람들과, 그 과정에서 찢겨 나가는 얼굴, 그리고 비명 소리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누군가 비틀린 가면을 쓴 채 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네가 만든 세상은 지옥이야."

 

꿈은 굉음과 함께 끝났다. 이한은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꿈속의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쓴 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페이스칩의 반짝임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었다.

 

이한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탐정 사무소인 자신의 공간에서는 진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텅 빈 방 안에어만큼은, 가면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가면을 쓰지 않은 얼굴은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눈빛은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는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외로움을 모두 담고 있는 듯했다.

 

이한이 개발한 페이스(FACE)칩은 단순한 칩이 아니었다. 얼굴 접근 칩(Face Access Chip)의 약자인 이 칩은 모든 개인 정보와 신원, 심지어 생체 정보까지 담고 있었다. 얼굴에 이식된 칩은 눈동자 인식, 뇌파, 그리고 심장 박동과 연동되어 착용자가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결제, 신분 증명, 의료 기록 등 모든 것이 이 칩 하나로 해결되었다. 기술은 인류를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재앙을 불러왔다.

 

칩을 노린 범죄, 이른바 얼굴절도가 급증했다. 가면을 쓴 범죄자들은 칩이 이식된 얼굴 전체를 훼손하는 잔혹한 방식으로 타인의 신원을 빼앗았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지키기 위해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가면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곧 자신의 사회적 얼굴이 되었다. 가면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존재가 부정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칩을 이식하고 가면을 쓰는 것이 당연한 문화가 되어버린 사회. 가면 아래 진짜 얼굴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오직 자신만의 것이 되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낡은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액자 속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세 명의 젊은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한과 민준, 그리고 서현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가면 문화가 확산되기 전, 풋풋하고 순수했던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한은 액자를 조심스럽게 뒤집어 놓았다. 더 이상 그들의 웃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행복했던 과거는 지금의 비극적인 현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그 때, 사무소 문이 열리고 유서현이 들어섰다. 그녀는 익숙한 패턴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은 마치 그녀의 일부인 양 자연스럽게 얼굴에 붙어 있었다. 이한은 서현의 가면을 보며 물었다. "손님은?"

 

"아직, 벌써부터 가면 벗고 다니면 누가 우릴 의심할지 몰라."

 

서현은 그렇게 말하며 가면을 벗고 이한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지난 세월의 고단함이 새겨져있었다. 깊어진 눈가의 주름, 약간은 굳어진 입술. 그녀의 눈빛은 이한을 향해 따뜻했지만, 그 속에는 체념과 안타까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늘도 악몽 꿨어?"서현이 조용히 물었다.

 

이한은 고개를 젓는 대신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그들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과거를 기억했지만, 그 기억을 꺼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잠시 후, 사무소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긴 코트와 평범한 흰색 가면을 쓴 여성이 들어섰다. 그녀의 몸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여자는 이한과 서현을 보고 주저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한 팀장님이 맞으신가요? 제 남편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의 페이스가 블랫마켓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여성의 목소리에는 절망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이한은 조용히 의뢰인의 가면을 바라봤다. 가면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불안한 몸짓만으로도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한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또다시 그가 만든 기술이 누군가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가면은... 함께 계시던 분의 것인가요?" 서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남편의 것이 맞아요. 저는 그저 평범한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남편은 칩 보호 기능이 있는 고가 가면을 쓰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일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이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몫인 듯 묵묵히 의뢰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가 매일 밤 꾸는 악몽의 연장선이었다. 가면의 기능에 따른 계급 사회와 빈부 격차는 이미 이한이 시스템을 만들 때 예상치 못했던 비극이었다. 그는 완벽한 세상을 꿈꿨지만, 그 결과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사회였다.

 

의뢰인의 이름은 한지아. 그녀의 남편, 김민규는 일주일 전 집을 나선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페이스 칩이 활성화되어 있으니 생존해 있을 거라는 형식적인 답변만 돌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지아는 남편의 칩이 블랙마켓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타정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한은 침묵 속에서 의뢰인이 내민 자료들을 훑어보았다. 김민규의 페이스 칩 정보, 마지막 결제 내역, 그리고 그의 가면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가면은 검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표면에 미세한 회로들이 빛나고 있었다. 바로 블랙스크린 기업이 특허를 낸 칩 보호 기능이 탑재된 가면이었다.

 

"남편분의 칩은 해킹된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칩이 지금 어디 있는지, 누가 쓰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지아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서현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요. 페이스 칩은 해킹 방어 기능이 워낙 뛰어나서, 칩이 탈취된 경우에는 추적 자체가 불가능해요. 설령 칩을 찾더라도, 칩을 통해 해킹당할 위험 때문에 진짜 신분을 알아내기도 어렵죠."

 

하지만 이한은 달랐다. 그는 묵묵히 자료를 응시했다. 이 칩과 가면 시스템을 만든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모든 보안 체계와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 이 시스템을 설계할 때, 완벽한 보안을 자랑하는 방패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창 또한 그가 설계했었다.

 

이한은 의뢰인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칩을 해킹해서 돈만 빼갔을 겁니다. 하지만 남편분의 페이스 칩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건...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돈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살아있는 가면은 신분 자체를 사고파는 행위입니다. 이 사건은 다른 사건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의 말에 서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이한이 이 사건에 얼마나 깊이 몰입하고 있는지 직감했다. 이한은 단순히 의뢰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기술의 폐해를 직접 마주하고, 그 고리를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한은 의뢰인에게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사건을 맡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저는 단순히 칩의 행방만 쫓지 않을 겁니다. 그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실까지 파헤칠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저를 믿고 기다려주셔야 합니다."

 

지아는 잠시 망설였다. 이한의 눈빛은 그녀의 불안을 잠재울 만큼 강력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순간, 이한의 표정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그가 다시 가면 뒤의 어둠 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의뢰인이 나간 후, 서현은 조용히 이한에게 다가갔다. "무슨 생각이야? 그 사건은 너무 위험해. 가면 뒤에 블랙마켓이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위험한데, 이 사건은 그 이상일 수도 있어."

 

"알아.하지만... 이건 내 문제야." 이한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죄책감이 배어 있었다. "내가 만든 칩 때문에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가면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내가 이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나는 내 손으로 이 지옥을 끝내야 해."

 

서현은 이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나도 함께 함께. 하지만 약속해줘. 위험한 짓은 혼자 하지 않겠다고."

 

이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가면 없는 얼굴로, 오직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며.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은 과거의 아픔을 넘어,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싸움을 향해 있었다. 이한의 첫 번째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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